[신작추천] 미국 최고 안보 전문가가 말하는 "우리 세상은 얼마나 더 위험해지고 있는가?" <배틀그라운드, 교유서가>

"미국은 초강대국의 권좌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미 육군의 지성’ 백악관 전 국가안보보좌관 맥마스터가 쓴 신 냉전시대 새로운 패권체제의 위협에 관한 냉철하고 지적인 분석"

2018년 4월 27일, 전 세계의 시선이 한반도로 쏠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판문점에서 첫 정상회담을 연 것이다. 바로 몇 달 전만 해도 북한이 여섯번째 핵실험을 강행하고 트럼프가 '화염과 분노'로 북한을 응징하겠다고 공언하면서 한반도는 전쟁 분위기였다. 인터넷에서는 미국인들이 남한에서 탈출 준비를 시작했다는 둥 온갖 출처미상의 소문들이 떠돌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손바닥 뒤집듯 분위기는 일변했다. 온갖 호전적인 발언을 주고받으면서 갈 데까지 가보자던 때가 언제였던가 싶을 정도로 두 지도자가 함빡 웃음을 터뜨리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서로의 손을 맞잡는 모습을 TV로 보면서 감동했던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2018년은 마치 얼어붙은 한반도에 모처럼 봄이 온 것같은 한 해였다. 판문점 회담에 이어서 한달 후에는 백두산에서 제2차 정상회담이 열렸고, 9월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김대중, 노무현에 이어서 세번째로 평양을 방문했다. 그로부터 3년여가 지난 지금, 한반도의 시계는 도로 옛날로 되돌아갔다. 세 번의 정상 회담이 무색하게 남북 대화는 사실상 중단되었고 북한은 우리를 얕보지 말라며 연일 호전적인 발언을 일삼으면서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핵 실험 재개도 시간 문제일 듯 하다. 물론 양쪽 지도자들이 손 한번 잡았다고 하루아침에 통일이라도 올 것인양 기대한 사람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쯤은 뭐라도 진전이 있어야 마땅할 것인데 현 정권이 그렇게 큰 소리 치더니만 도대체 이전 정권보다 나을 것이 뭐가 있냐고 따질 만 하다.

북한이야 원래부터 구제불능의 글러먹은 놈들이라 말을 들게 하려면 역시 사탕보다는 몽둥이가 약이라고 치더라도, 더 큰 문제는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한반도 주변의 상황이 갈수록 첨예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이 본격적으로 중화주의를 내세우고 미국 패권주의에 정면 도전하면서 미중 갈등이 격화되고 있으며, 구 소련의 부활을 내건 푸틴의 러시아 역시 우리도 대국이니 존엄을 무시하지 말라면서 우크라이나를 놓고 미국, 나토와 기 싸움을 벌이고 있다. 흔히 '오만한 나라 미국'이라며 미국의 횡포도 만만치 않다지만 우리 같은 자유세계 국가들로서는 좋건 싫건 결국 믿을 구석은 미국밖에 없다는 점이다. 미국은 그나마 국제 사회의 눈치를 보고 말을 듣는 시늉이라도 한다면 독재 국가인 중국이나 러시아는 아예 시늉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오직 힘의 논리가 있으며 도의나 원칙이 아닌 힘 앞에서만 꼬리를 내린다.

물론 중국, 러시아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아직은 미국의 상대가 될려면 엄마 젖 좀 더 빨고 와야 될거라고 하지만 반대로 미국 이외에 이들을 견제할 수 있는 나라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한 세기 전 지구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유럽 열강들은 더 이상 열강이 아닐 뿐더러, 제 발등에 떨어진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급급하다. 하지만 미국 역시 점점 노쇠한 대국으로 전락하고 있다. 오늘의 미국은 더 이상 30년 전 냉전에서 승리를 거둔 세계 유일의 잘 나가던 초강대국이 아니다. 미국을 향한 도전은 한층 거세진 반면, 지치고 병들고 가난해진 미국은 70년 전 영국과 프랑스가 그러했듯 그나마 더 많은 것을 잃지 않으려고 여기저기서 발을 빼고 있다. 몇달 전 아프간에서는 미군이 미처 철수하기도 전에 카불이 탈레반의 손에 넘어가고 20년 동안 쏟아부은 천문학적인 돈과 수천여명의 희생이 무색할 만큼 친미 정권은 모래성마냥 무너져 내렸다. 타이완 해협에서는 시진핑이 타이완더러 기회를 줄 때 중국의 품에 돌아오라며 연일 무력 시위와 압박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한반도는 미, 중, 러 삼대국의 힘이 맞딱들이는 세계 최대의 화약고이다. 한국전쟁이 직접적으로는 우리가 아다시피 김일성이라는 얼치기 야심가가 저지른 불장난이지만, 그 배후에는 트루먼과 스탈린의 그레이트 게임이 있었던 것처럼 한반도 문제는 우리 손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주변 열강들의 세계 전략과 이해타산에 좌지우지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제아무리 '동북아 균형자론'이니 거창한 표현을 갖다 붙이면서 미, 중, 러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한들, 결국 한반도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라는 점이 냉혹한 현실이다.

우리가 평화롭고 풍요로운 세상을 당연한 듯 누리는 동안,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한반도를 각축장으로 삼아서 열강들의 첨예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과연 우리는 차라리 모르는 것이 약이라며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이 옳은가. 수백년 전 중화 헤게모니에 의존하여 안보를 포기했다가 두번의 외침과 결국 국권마저 빼앗겼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그러했듯, 우리 역시 현실에 안주하면서 등 뒤에는 든든한 미국 큰 형님이 있다는 것만 굳게 믿고 여차하면 미국이 알아서 해결해 주리라고만 여기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가 제아무리 한미동맹을 강조한들, 미국은 미국의 입장이 있으며 미국의 이익과 우리의 이익이 상충했을 때 가차없이 우리를 내버릴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망각해서는 안된다. 더욱이 미국은 중국, 러시아만큼이나 변덕스럽고 예측 불허이며 그들의 보호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그 이상의 댓가를 치러야 한다. 세상은 공짜가 없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주변 열강들의 정치적 역학 구도에 끊임없이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함에도, 우리네 정치인들은 여야 할 것 없이 누가 미국에게 더 충성할 자격이 있는지를 놓고 좌니 우니 하면서 서로 물어뜯기에 급급하다. 좁은 한반도 안에 갇힌 채 세상 돌아가는 꼴 모르던 그 옛날 양반 샌님들을 우리가 '우물안 개구리'라며 비웃기 앞서서, 이제는 그들의 실수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때가 아닐까.

엊그제 글로벌 정치와 국제 관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주목할 신작 도서가 나왔다. 전쟁과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교유서가에서 나온 <배틀 그라운드 : 끝나지 않는 전쟁, 자유세계를 위한 싸움>이다. 저자는 허버트 레이몬드 맥마스터(Herbert Raymond McMaster) 예비역 장군으로 대단히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1991년 걸프 전쟁에서는 제2기갑기병연대에서 중대장으로 전차 부대를 지휘했으며, 9대의 M1 전차로 이라크군 최정예로 이름난 공화국 수비대를 상대로 단 한 대의 아군 손실 없이 30분 동안 이라크군 전차 28대를 일방적으로 격파하여 은성 훈장을 받았다. 이후 웨스트포인트 역사 교수와 미 중부군 사령부 참모, 2003년 이라크 자유 작전 참가, 포트 베닝 기동 훈련 센터장, 트럼프 시절 국가안보보좌관 등을 지낸 후 2018년 중장으로 은퇴했다. 아프간 전쟁을 지휘한 데이비드 바노(David Barno) 중장은 그를 가리켜 "미군의 미래 설계자(the architect of the future U.S. Army)"라고 격찬했고, 타임지는 2014년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전설인 셈이다.

트럼프 왼쪽의 대머리 아재가 맥마스터 중장. 그는 2017년 2월부터 2018년 5월까지 현역 장군으로서 트럼프의 안보보좌관을 지냈으나 수석 보좌관이자 트럼프의 간신배로 이름난 스티브 배넌의 심한 견제를 받아야 했다. 스티브 배넌은 온갖 선동과 허위 뉴스로 그를 공격했다. 또한 트럼프에게도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결국 경질되어 네오콘이자 최근 회고록으로 트럼프의 뒷통수를 날리게 되는 존 볼턴으로 교체되었고 군대에서도 퇴역했다. 트럼프라는 인간과 엮여서 이래저래 좋은 일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배틀 그라운드>는 미 육군의 싱크탱크이자 미국 최고의 국가 안보 전문가로서 오늘날 세계 유일 초강대국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 미국의 위기와 미국이 그동안 무엇을 잘 못 했으며 왜 이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는지, 미국과 우리를 비롯한 자유 세계 동맹국들이 직면한 도전들, 앞으로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 지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때로는 성찰하면서 조언하는 내용이다. 맥마스터의 후임자였던 존 볼턴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The Room Where It Happened: A White House Memoir)이라던가, 한 때 트럼프의 충신으로 자처하면서 온갖 아첨을 떨었던 자들이 나중에 트럼프와 틀어지자 대번에 앙심을 품고 옛 주인을 향한 비방과 폭로전을 펼쳐며 마지막까지 추태를 부리는 것과 달리, 맥마스터의 책은 트럼프 일당의 치부를 가쉽거리인양 독자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생을 정치와 거리를 둔 직업 군인답게 개인적인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자신이 '깡패국가들'을 상대로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한 것들, 즉 미국과 우리 세상이 어떤 위기에 처했는지를 경고한다. 그런 점에서 조지 마셜과 콜린 파월 이래 진정한 참 군인이라고 할 만 하다. 덧붙여, 트럼프 임기 말인 2020년 9월에 나온 이 책은 현재 아마존 베스트셀러 중 하나이다.

"푸틴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강대국으로서 러시아의 위상을 되찾는 것이었다. 러시아가 다시 서방과 동등한 힘을 구축하는 데에는 족히 15년은 더 걸릴 것이기에 그는 참고 기다려야 했다. 정말로 15년이 흐른 뒤 푸틴은 크림 반도를 병합하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으며 시리아 내전에도 개입했다." - p.58

"미국 정부와 민주당, 공화당 선거 본부는 후보자들이 민주적 과정을 뒤흔드는 러시아의 시도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준비가 반드시 필요로 했다. 미 CIA 부국장을 지낸 데이비드 코헨은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러시아가 유럽에 개입하는 모습을 목격했다....우리는 러시아가 다른 곳에서 그런 일들을 했는데 미국에서 똑같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길 이유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우리 스스로 대비하려는 노력은 게을리 했다."라고 회고했다. - p.84

"자금성 구경이 끝나자 나는 미국 정책에 극적인 변화가 필요하며 이미 한참 늦었음을 확신했다. 자금성으로 우리를 안내한 것은 중국이 세계무대의 중심국가로 복귀하려는 자신감을 전달하려는 의도였겠지만, 나로서는 중국 공산당이 국경을 넘어서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굴욕의 세기 동안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이끌려는 거대한 야망 못지 않게 두려움도 함께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 p.145

"2019년 11월 <뉴욕타임스>는 중국 공산당의 누군가가 유출한 것으로 보이는 문서를 찾아냈다. 400쪽이 넘는 이 문서들은 모든 소수민족의 저항을 진압하고 100만 명 이상을 강제 수용소에 가두어 체계적인 세뇌와 문화 통제를 수행하라는 당의 지령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또한 시진핑 주석이 소수 민족을 단속하면서 "절대로 자비를 베풀지 말라"고 관리들에게 지시한 내부 연설도 있었다." - p.157

"인민해방군은 일본의 오가사와라 제도와 미국의 마리아나 제도를 포함하는 제2의 섬 사슬 전략으로 군사력을 확장하기 위해 육지와 해상, 항공체계를 현대화했다. 또한 분쟁이 발생할 경우 미 해공군이 개입해야 할 때마다 그에 따르는 부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의 능력을 과시하고 있다." - p.179

"미국은 처음부터 탈레반 이후의 아프가니스탄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에 관심이 없었다.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군사적 개입에 대한 역사에 무지했던 미국 전략가들은 아프간이 또 다시 테러집단의 은신처가 되지 않도록 꼭 필요한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지 않았다. (중략) 부시 행정부는 두 달 일찍 시작한 이라크 전쟁에 집중했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전쟁에만 신경쓰면서 아프간과 남아시아에 대한 효과적인 전략의 개발에 어려움을 겪게 될 수밖에 없었다." - p.230

"2009년에서 2010년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순간에 새로운 미국 행정부는 새로운 수준의 전략적 자아도취에 기반한 정책을 추진한다. 즉, 미국과 직접 관련이 없는 한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모든 결과에 비관과 체념으로 일관하겠다는 것이었다. 버락 오바마는 대선에서 16개월 안에 미군을 철수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부시 행정부의 과신론은 미국 개입의 위험성과 비용에 대한 과소평가를 초래했다면, 오바마 행정부의 비관론은 철수의 위험성과 비용에 대한 과소평가로 이어졌다." - p.353

"이란이 개입한 대리전쟁이 더욱 위험한 이유는 각 민병대에 고성능 무기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즈볼라와 후티 반군은 모두 유도 미사일로 선박을 공격하는 능력을 과시했다. 이란의 사이버 공격이나 무인기 공격은 중동은 물론, 그 밖의 국가에도 경고가 되고 있다." - p.447

"중국 지도자들은 핵무기로 무장한 북한이 중국과 세계 전체에 좋지 않은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 북한 핵무기는 중국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될 뿐더러, 주변 다른 국가들에게 김정은 정권을 저지하기 위한 자체 핵무기 보유를 고려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그런 주변 국가에 일본과 한국이 확실히 포함되겠지만 타이완이나 베트남이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미국이 한일 양국의 핵무기 개발을 억제했던 것처럼 중국도 북한에 대해서 같은 역할을 할 때이다." - p.488

"파리기후협정은 안일한 분위기를 조성했기 때문에 오히려 위험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협정 참여자들은 지자들의 기분을 뿌듯하게 만들었겠지만 협정 내용은 강제적인 구속력이 없을 뿐더러, 앞으로 수십년 동안 인간이 유발하는 가장 큰 지구온난화의 원인, 즉 중국과 인도, 그리고 아프리카 개발도상국들의 급증하는 탄소가스 배출량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 p.565

이 책에서 저자는 러시아와 중국, 북한, 이란을 비롯하여 이른바 '깡패국가들'이 국제 질서를 어떻게 위협하고 있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냉전에서 승리한 유일무이의 미국이 이토록 쇠락하게 된 원인,역대 행정부들은 이러한 도전에 어떻게 대처했으며 그 한계가 무엇이었는지 개인적인 정치적 견해와 특정 당파를 떠나서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식견을 통해서 냉철하게 분석한다. 물론 미국의 적들 입장에서는 "그러는 미국은 우리와 뭐가 다르냐", "저자가 말하는 국제 질서라는 것도 결국 미국 주도의 패권주의가 위협받기 때문이 아니냐"라고 항변할 것이며 전적으로 틀린 말도 아니다. 모든 나라가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미국 패권주의를 한 세기 전 빅토리아 시절의 유럽 식민주의나 나치와 소련의 패권주의처럼 일방적인 지배-피지배와 동일하게 여기는 것 또한 성급하고 무지한 생각이다. 미국은 적어도 언론에 의한 비판과 감시를 허용하고 정책적 실패에 대해서 선거로 심판하지만, 중국과 러시아, 북한같은 통제 국가들은 아예 그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중의 도서들을 보더라도 소위 중국인 전문가들은 미국의 오만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국에 대해서는 찬양 일변도이며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자신들이 뭘 잘 못 해서가 아니라 죄다 남들의 오해나 선입견, 미국의 악선전 탓으로 돌린다. 뭐가 잘못되었는지조차 그들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그런 생각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미국이 아무리 오만한들, 어느 누구도 미국 대신 중국, 러시아, 북한의 세력권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구 소련이 붕괴되고 인류가 핵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난 지 벌써 30년이 지났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평화롭지 않다. 당장 지금도 타이완 해협과 우크라이나에서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오히려 냉전 시절에는 적과 친구가 누구인지 분명했지만 지금은 그조차 명확하지 않다보니 대처가 어렵다는 점이다. 미국은 쇠락했고 타락한 정치인들은 개인적인 권력욕에만 눈이 먼 나머지, 국민들 몰래 미국의 적들과 손을 잡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는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힐러리보다 트럼프가 훨씬 만만하다고 여긴 푸틴이 자신의 정보기관과 인터넷을 이용하여 미국 여론을 조작하고 트럼프 당선에 일조했다는 사실이 까발려지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우리도 과거에 선거 때만 되면 이른바 '북풍' '총풍'이라는 것이 있었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우리 정보기관이 특정 정당을 밀기 위해서 북한과 결탁했다는 것은 암암리에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행태가 과연 어느 한쪽에만 국한될 것이며, 다 지나간 일일 뿐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푸틴이 러시아의 적들을 분열시키기 위해서 미국과 유럽의 선거에 개입했던 것처럼 중국과 북한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 여야 정치인들이 당장의 선거에 이기기 급급하여 국민들 등 뒤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우민정치로 전락시키는 것이며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트럼프 시절의 미국 우민 정치를 비꼬는 블랙 코메디 재난 영화 <돈 룩 업( don't look up)> 여기서 돈 룩 업이 가리키는 것은 진실이다. 당장 인류 멸망을 눈앞에 두었음에도 끝까지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 선거 승리에만 급급하여 지지자들과 상업 미디어를 내세워 우리가 다 알아서 할 것이니 너희는 관심을 끄라고 우매한 국민을 선동하다가 막판에 자기만 살자며 달아나는 권력자(메를 스트립)의 모습은 오늘날 위기 의식을 상실한 채 우민 정치로 전락하여 자기들끼리 편 가르기하는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에서는 미국의 위기를 얘기하지만, 결국 우리의 위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스라엘이나 스웨덴처럼 자기 운명을 자기가 주도할 수 있는 지역 강소국이 아니며 지정학적으로 열강들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는 갈대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생존 투쟁에 나서야 할 때이다. 꼭 400년 전에도 우리는 똑같은 위기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 명-청 교체기에 조선은 중화 헤게모니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어영부영하다가 정묘-병자호란이라는 호된 대가를 치렀다. 그 때의 상황이 재현되고 있지만, 과연 우리는 얼마나 위기 의식이 있는가.

그 옛날 조상님들이 그러했듯, 자기네 밥그릇이 전부인양 좌이니 우이니 국민들을 편 가르기하면서 태평스럽게 우리가 아는 세상이 언제까지 계속되리라 여기는 정치인들이야말로 이 책을 꼭 읽었으면 한다.